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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타로는 전장에서 오랜 시간을 지내왔으니까 무심코 다쳐서 피 냄새가 날때면 민감하게 반응했을 것 같아. 종이에 베어도 시호는 아무렇지 않게 따갑네.. 하고 무시하는걸 코타로는 파상풍이 일어날지 모른다며 꼼꼼한 치료, 절대 안정을 요구하겠지. 시호가 아무렇지 않다고 해도 그렇게 하면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며 답지않게 고집을 부리는거지. 그렇게 진선조와 싸움 이후에도 얇게 베인 상처도 아주 꼼꼼하게 치료해주는 코타로일거 같아. 2년후 총리대신이 된 코타로 곁에서 경호와 비서를 겸사 하다보니 서류를 넘겨줄 때 가볍게 종이에 베이는 일이 종종 있지 않았을까. 시호는 무심코 아, 하고 입으로 가져가 피를 빨아먹는 습관이 있었는데 코타로도 가끔씩 종이에 베이면 시호가 앙 하고 무심코 코타로 손을 빨아먹은 적도 있었을 것 같지. 그때는 코타로도 시호도 당황하고 마는데 여기서 아무렇지 않은척 시호가 입을 떼니까 말을 꺼내기 무거운 분위기가 되었을 것 같아. 아니 오히려 두 사람 다 붉게 물든 얼굴을 보고 말을 하지 못했을지도. 그리고 코타로는 이 분위기를 깨기 위해 그제서야
"이, 이게 무슨 짓인가 시호..!"
"버릇이 그만.."
"이렇게 작은 상처라도 파상풍이 일어날 수 있다네!"
"그래도 지혈이 먼저 아니에요?"
"그,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게다가 침 성분에는 소독을 대신하는 ㅈ.."
"그만.. 그만하게. 설마 다른 사람에게도 하는건 아니겠지?"
"버릇이라고 해도 해도 되는 사람과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은 구분 한다고요.."
"그건 참 다행이군.."
축축해진 손가락을 보며 코타로는 고맙다고 작게 중얼거리고 시호는 얼른 구급상자를 가져와 약을 발라주었지. 시호는 약을 발라주면서도 코타로의 눈치를 봤을 것 같아. 혹시 마지막에 다행이라는 말은 질투 였을까 하고 물어보고 싶다는 얼굴로. 코타로는 그런 시호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눈을 질끈 감고 제대로 말을 전했을거야.
"다른 사내에게는 해주지 말게. 우린 그, 연인 사이니까.. 괜찮지만."
"당연하죠!"
자신이 듣고 싶었던 말을 들은 시호는 그제서야 활짝 웃으며 코타로를 바라봤을 것 같아. 그래, 말할 수 있을때 제대로 전해야 알아줄테니까.. 라고 합리화를 하는 코타로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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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타로나 시호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으나 지금 살아가는 "현실'이 무뎌지는 건 두려웠을 것 같아. 조금 옛날이야기를 할 때면 바로 앞에 생생한 추억이 펼쳐지잖아.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때 그 사람의 목소리, 얼굴이 흐려져 결국 잊게 되더라고. 가령 가장 소중했던 가족이라도 말이야. 코타로에게 처음 자신의 가족을 얘기했을 때는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제서야 다시 말을 꺼내보아도 이제는 어떤 목소리였는지 기억도 못 하는 시호야. 그리고 그건 코타로도 마찬가지일 거야. 함께 목숨이 오간 수많은 동료들의 이름, 얼굴, 행동들.. 전장을 지휘하는 자로서 당연히 모두를 기억하는 코타로였지만 이제 와서 기억을 더듬어 보면 함께 희망을 가지던 그 미소도 전장에서 나뒹구는 시체들로 기억될 수밖에. 오늘 당장 이 순간에 죽더라도 이상하진 않는 둘이라 죽음에 쫓기는건 익숙하지만 언젠간 이 순간이 기억하지 못할 만큼 무뎌지는건 죽어도 싫은 코타로와 시호일 것 같아. 어쩌면 삶의 무게일지도 몰라. 추억은 한 순간이고 그에 반해 인생은 좀 더 긴 시간이 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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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개에 상대방의 이름을 적고 그 지우개가 전부 닳을 때까지 가지고 있으면 짝사랑이 이루어진 다는 그런 유치한 이야기, 하지만 사랑을 알아가기 시작하는 10대에게도 그 헛소문이 유치하게 느껴졌을까? 10대에 마지막을 보내는 시호는 이런 헛소문이라도 믿고 싶을 만큼 사랑을 알아가는 소녀야. 시호는 만화적 표현을 빌리자면 코타로에게 정말 첫눈에 반했을 것 같아. 남자답지 않게 찰랑 거리는 머리카락 그리고 여자애게서 날 것 같은 향긋한 향기에 길고 뻗은 다리 등 전혀 사내라고 볼 수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고지식해 보이는 치겨세운 눈썹 어디를 보는지 모르지만 올곧은 눈까지. 시호는 그 순간이 멈춘 것처럼 저절로 그를 눈으로 쫓아갔지만 갑자기 “조심해!!” 라는 말이 들리고는 그대로 축구공에 맞아 엎너지는 시호일 거야. 이상한 소리를 내며 아프다고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는데 코타로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다 안 웃은척 헛기침을 했지. 시호는 속으로 지금 웃은거야?! 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코타로가 다가와 손을 내밀어주었어.
“괜찮은가?”
“어.. 응..”
“조심하게. 자네들도 말이야.”
“미안, 공 좀 던져줄래?”
“…”
공을 던져 달라는 축구부 얘들의 부탁으로 코타로는 발로 공을 차는데 하필 제채기가 나오는 바람에 헛발질을 했을 것 같지. 그 모습에 뒤에 있던 시호도 아까 코타로와 같이 작게 웃음을 터트려 버렸어. 코타로는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서 “이제 가지.” 라고 당연하게 말했을 것 같아. 그 말을 듣고 자연스럽게 “응” 이라고 대답해버린 시호지만 생각해보니 본인은 그를 처음보거 그도 본인을 처음 봤을 터인데 어딜 가자는거지? 라는 생각이 드는 시호야.
“그런데.. 나 알아?”
“모르네. 하지만 자네 교복이 새거인 것을 보았을 때 나와 같은 입학생이라 생각했네. 아닌가?“
”아, 맞아.. 보기와 다르게 똑똑하네..“
”응? 뭐라 했는가.“
”아무말도. 늦겠다.“
입학식이라고 다름질을 열심히 하고 아침에 거울을 보고 온 교복이 새거라는 것을 파악하고 거기까지 내다보다니 꽤 똑똑한 학생인가. 이게 바로 시호의 코타로의 첫인상이였을 것 같아. 그리고 코타로에게 시호는 어딘가 빠진 구석이 많은, 덜렁 거리는 여자아이라고 생각했겠지. 그리고 그 순간부터 시호는 그런 그를 시선 끝에 두었을 것 같아. 처음에는 자각이 없는 짝사랑이였을 거야. 우연히 코타로 옆을 스쳐 지나가고 그가 도서관에 자주 들린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책이랑 절교했던 시호임에도 코타로의 한 발자국 뒤에서 언제나 그를 바라봤어. 참으로 풋풋한 소녀의 첫사랑이였지. 그리고 3학년 처음으로 같은 반이 된 코타로와 시호야. 아마 시호는 코타로가 첫 만남을 기억하지 못할거라 생각했지만 언제나 자신의 뒤를 따라다니는 소녀를 그는 기억했을 거야. 자신을 쫒아 후다닥 도서관에 왔다가 사서에게 혼나는 모습을, 책을 당당하게 꺼내 어느새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는 소녀를 말이야. 또 다시 그 모습을 상상하니 풋, 하고 작게 웃어버린 코타로야. 첫 만남때 처럼. 뭐, 우선은 짝꿍이니 잘 부탁한다고 인사를 건낸 코타로에 시호는 그에 반응해 "나도, 잘 부탁해!"라며 웃어보인 시호지. 코타로의 행동이 잠깐 멈칫 한 건 기분탓일까 시호는 인사 했다는 사실 만으로 행복해 했을 것 같아. 그리고 본격적으로작된 시호의 짝사랑. 시호는 코타로와 앞자리에 앉았지만 자주 졸았을 거야. 그리고 흥미가 없는 수업에는 딴짓을 하고 있는게 옆에 있는 코타로에게도 바로 보였어. 시호는 쉬는 시간에 타에에게 들은 방법을 사용해보기로 했고 조심스럽게 옆에 있는 코타로를 바라보았어. 코타로는 자신이 시호를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다급하게 눈을 돌려 수업에 집중하고 있는 것 처럼 행동했지. 그리고 들리는 시호의 작은 목소리.
"있지.. 카츠라군 혹시 지우개 빌려줄 수 있을까?"
".. 여기. 다음에는 챙겨 오는게 좋을걸세."
"응, 고마워. 물건을 잘 잃어버리거든."
손끝이 살짝 스치며 두근 거리는 그런 상상을 해본 시호지만 친절하게도 제 손에 지우개를 떨어트려 주는 코타로일거야. 아쉬운 마음은 뒤로 하고 수업에 집중하고 있는 코타로 몰래 지우개 커버를 벗기고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작게 그리고 반듯하게 자신의 이름을 적어두었을 거야. 남의 물건에 장난치는건 예의가 아니지만 그만큼 그에 대한 마음이 진심인 시호라서 모른척 자신의 지우개에는 그의 이름을 한글자 한 글자 소중한 듯이 적어갔을 것 같아. 그리고 모른척 코타로에게 다시 지우개를 돌려주었고 성공했다! 라는 성취감에 빠져 딴짓을 했다는 이유로 파치에게 혼이 났을 것 같지. 하지만 들키지 않고 성공했다는 사실에 뿌듯하게 자신의 필통에 넣은 지우개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시호야. 문제는 다음날이였지. 타에와 함께 숙제를 하고 있을 때 지우개를 잃어버렸다며 빌려달라는 타에에게 거부하지 못하고 지우개를 빌려주었어. 혹시나 들킬까봐 조마조마한 시호는 타에가 지우개를 사용하는걸 노려보고 있었고 타에는 그 시선에 부담스러워 말을 꺼냈어.
"있지, 쇼쨩. 이 지우개 그렇게 소중한거야?"
"으,응? 아냐 아냐."
"하지만 아까부터 쳐다보고 있는걸."
"아.."
"그런 소중한 지우개면 차라리 품에 가지고 다니는게 어때."
"! 그게 좋은 생각이야."
"후후, 역시 소중한 거였구나."
얼굴이 조금 붉어진 시호는 말을 돌리며 은근슬쩍 타에에게 돌려받은 지우개에 이름이 남아있나 확인하고 품에 넣었을 것 같아. 그런데 지우개를 품에 넣고 있다보니 정작 사용할 지우개가 없어져서 어쩔 수 없이 말을 걸 목적으로 코타로에게 다시 자우개를 빌려달라고 하는 시호일거야. 어쩐지 당황한 코타로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야말로 시호의 꿈이 와장창 깨져버렸어.
"아.. 미안하네. 지우개를 잃어버려서."
"아.. 그러면 어쩔 수 없지. 그런데 잃어버릴 성격은 아닌 것 같아는데."
"확실히. 물건을 잃어버린건 이번이 처음이네."
"아하하. 난 자주 잃어버려서.."
끝말을 흐리고는 어떡하지 라는 말을 중얼 거리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시호야. 왜 하필 그 지우개를 잃어버렸을까 싶지만 어쩔 수 없다고 포기했을 시호일 것 같아. 사실 이 헛소문에 대한 믿음은 반반이였으니까. 그에 대한 마음이 결코 가벼운건 아니지만 이런 헛소문에 전부 맡길 생각은 없었어. 하지만 물건을 잘 잃어버리지 않는 코타로가 오직 그 지우개만 왜 잃어버렸던 걸까. 이런 의문만 남은 사건일거야.